석남사 입구 계단에서 기념사진서운산 석남사 현판이 걸린 첫 관문석남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교구 용주사의 말사로서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 상중리 서운산 자락에 있다. 통일신라 문무왕 20년 고승 석선이 세웠고 고려 초기에 혜거국사가 중수하였으나 임진왜란때 불에 타 나중에 화덕이 중건한 절로 알려져있다. 현재 석남사에는 대웅전과 영산전 두 불전울 중심으로 요사체, 누각, 탑, 부도, 마애불 등이 있다. 이물 유적과 유팔은 거의 조선시대에 조성되었으나 신라 말 또는 고려 초기로 추정되는 마에불이 사역 근방에 남이 있고, 조선 초기에 조성되었다고 추정되는 석탑 동으로 미루어 법통은 꾸준히 계승되어 왔음을 장작앞 수 있다석남사 대웅전석남사 담장길석남사 좌측 아래 언덕에 홀로 선 노송들머리 이정목ㅡ서운산 1.9Km<서운산에 대하여> 경기도 최남단에 위치한 서운산은 '청룡이 서운을 타고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하여 서운산 이라 전해진다. 능선은 부드럽고 산세는 경사가. 완만하며, 산자락엔 사찰과 옛 성터가 있어, 보고 생각하며 오르는 산이다. 산정상에는 임진왜란때 의병장 홍계남과 이덕남장군이 축성 한 길이 700m의 토성이 남아 있어 역사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입구에서 100m 갈림길, 우측은 편한 임도길, 좌측은 마애불을 거쳐가는 길마애불은 좌측으로마애불로 가는 산우들마애여래입상석남사 마애여래입상
石南寺 磨崖如來立像 Rock-carved standing Buddhist statue of Seoknamsa Temple 경기도 유형문화유산 Gyeonggi-do Tangible Cultural Heritage
암벽에 양각된 높이 5.3m의 마애여래입상이다. 이 불상은 민머리로 그 위에는 지혜를 상징하는 상투 모양의 육계* 가 있고 넓적한 얼굴에는 눈.코.입이 두텁게 표현되었다. 두 귀는 어깨에 닿을 듯 길게 늘어졌으며 목에는 번뇌.업.고통을 상징하는 삼도가 표현되었다. 머리 주변에는 세 겹의 원형 두광이 표현되어 있다. 옷은 두 어깨를 모두 덮는 통견으로 배 부분까지 U자형으로 내려오며, 가슴에는 내의인 군의의 매듭이 보인다. 신체의 주변에도 두광으로부터 이어지는 세 겹의 신광이 표현되었다. 두 손은 가슴 앞에 들어 오른손은 검지만을 펴고 원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어 설법인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하단에는 5개의 발가락이 뚜렷한데 연꽃 문양의 대좌 위에 올려져 있다. 머리와 몸은 비대한데 비하여 다리 부분이 짧다. 이마애불은 다소 형식적이며 지방적인 요소를 띠고 있다. 통일신라 마애불의 양식을 계승한 코려 전기의 마애불로 여겨진다.트위스트 소나무V소나무눈에 의해 꺽인 노송의 길우측 서운산 정상서운산 정상 표지석 뒷면정상에서 100여m 아래에서 시산제 준비<서운산성> 경기도 기념물 81호, 소재지: 경기도 안성시 서운면, 북산리 산2 이 성은 서운산의 서쪽 능선에서 서남방향으로 해발 535m에서 460m 지점까지 골짜기처럼 비탈진 사면을 삼태기 모양으로 둘러싼 반면식 토축산성이다. 둘레는 약 620m이고 성벽의 높이는 6~8m이며, 성벽 윗부분의 너비는 2~4m인데 성터 안쪽의 홈을 깎아 판축한 듯 성벽 안쪽이 파여져 있다. 동서 양쪽 끝이 높게 된 말안장 모양의 거의 자연지세를 이용하였고, 성안에는 우물터, 절터와 돌부처가 있으며 용굴이라 불리는 작은 동굴도 있다. 성안에서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이라 여겨지는데, 임진왜란때에 홍계남장군이 수축하여 방어전을 전개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정상에서 200여m 아래 헬기장에서 본 청룡저수지 방향탕흉대 갈림길 이정표탕흉대에 대한 설명 ㅡ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한마디로 무엇이다라고 요약하기 어렵다. 이곳에 올라서면 씻은듯이 가슴이 확트인다라는 정도 인듯암반에 초서체로 음각된 탕흉대 글씨ㅡ盪(씻을 탕) 胸(가슴 흉) 臺(대 대)탕흉대에서 내려다 본 안성좌성사 갈림길ㅡ 좌측으로<서운산성의 또다른 설명> 서운산성, 경기도 기념물 제81호
안성시 서운면 북산리 산1번지 이 산성은 경기도와 충북, 충남 3개도의 분수령을 이루고 있는 차령산맥(車嶺山脈)의 주봉인 서운산에서 서쪽으로 지봉을 이루고 있다.이 성은 퇴뫼식에 가까운 산성으로 토성이다.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축조하였기 패문에 성의 모형은 포곡선을 이루고 있다. 대부분의 산성은 유사시 피난처로 사용하기 위하여 축조한 것에 비하여 이 산성은 1592년 임진왜란을 당하여 이 지역의 의병장으로 활약한 홍계남 장군이 북상하는 왜적을 방어하기 위하여 의병을 지휘, 축성한 점이 특이하다 하겠다. 산성의 규모는 총연장이 620m인데 이중 서쪽과 북쪽의 자연성벽인 170m를 제외한 동.서.남.북 일대의 450m를 인위적으로 축조하였다. 성벽의 높이는 일정하지는 않으나 지형에 따라 대개 6~8m이며 성벽의 폭도 2~4m로 일정치가 않다. 축성기법은 대부분 능선을 따라 삭토법으로 축조된 산성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곳 지휘대는 사방이 조망되는 곳으로 정북 10km 지점에 안성시가 있고 정남 20km 지점에는 진천읍이 있으며 정서 12km에 성환읍, 정동 7km에 칠장사와 석남사 동남쪽으로 약 1km 지점에 청룡사가 있는 곳으로 이 산성의 위치는 전략적으로 요충을 이룬 지점이다. 임진왜란 당ㅅ 홍계남 의병장은 서운산성에 토성을 구축하여 우산성(右山城)이라하고, 이덕남의병장은 덕곡리 앞산에 역시 토성을 구축하여 좌산성이라하여 각기 둔병하므로써 기각지세를 이루어 왜병을 막았던 산성이다.뒷쪽에서 본 좌성사앞 우측에서 본 좌성사의 모습 ㅡ임도를 통하여 차량이 올라와 있다하산하면서 마주치는 청룡사청룡사 범종각의 뒷면청룡사 범종각의 전면 ㅡ 범종각 안에 법고도 있다. 어떤 사찰에는 법고각을 따로 세우기도 한다청룡사 대웅전 ㅡ 유수한 세월과 함께 한 모습대중전과 앞마당청룡사는 안성시 서운산에 있으며, 13세기 후반 원나라 승려인 명본국사가 처음 세운 대장임에서 시작되었디. 이후 약 100년이 지나 고리 공민청 때 보재존자 나응선사가 크게 다시 지은 다음 청통사로 부르게 되었다 공민왕 21년에 청룡사에서 간행한 능엄경등이 전해져 당시 활발하게 불사가 진행되었음율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 선조 30년에 징유재란이 일어나면서 절의 모든 건물이 불에 타 없이졌다.
대웅전은 선조 34년에 다시 지이진 다음 여러 치레 수리품 거처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건물 앞쪽 공포에는 활짝 핀 꽃 모양 조각이 있지만 뒤쪽 공포에는 없다. 뒤쪽 공포가 훨씬 이른 시기에 조성되었고, 앞쪽 공포의 조각은 수리하면서 조각을 추가했기 때문이다. 기둥은 구불구불한 아를드리나무를 나무껍질민 벗겨 내고 본래의 나무형태를 그대로 살려 세워 자언스러움을 추구하는 한국 건축의 특징을 질 보여 준다
대웅전 안에는 안성 청룡사 소조석가여래삼존상이 모셔저 있고, 사인비구가 만든 동증도 있다 뜨 사칠에는 높이 9m, 쪽 6.5m에 달하는 청룡사 영산회과불탱과 청룡사 감로탱이 있다. 이들은 대웅전과 더불어 17세기를 대표하는 문화재이다. 이 밖에도 금동권읍보살좌싱과 대웅전 앞에 있는 심층 석탑 등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사활 입구에는 사찰의 역사물 담은 사직비가 있는데, 조선 숙종 46년에 세은 것이다. 이 사적비에는 청룡사가 인조의 셋째 이들이며 효종의 동생인 안평대군의 원당이라고 적허 있다. 이를 통해 조선 후기에 청룡사가 왕실의 지원을 받이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절 근처에서는 조선 말 남사당패가 활동하기도 했다. 이들은 절 아레 불당골에서 겨울을 보내며 기예 연습을 하고, 청룡사에서 내준 신표를 들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언회를 하며 생활했다.날머리 청룡호수 공영주차장서운산행 궤적과 기록 8.5Km(시산제 포함 4:40)